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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금잔디가 4월 18일 가요무대에 출연합니다. 이에 오늘은 가수 금잔디 나이 근황 결혼 등 궁금해하실만한 내용들에 대해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금잔디 프로필 본명 나이 고향 가족 키 혈액형 종교 학력 소속사

 

 

가수 금잔디의 본명은 박수연인입니다. 참고로, 금잔디의 본명은 박수연인데, 원래는 처음 이름인 박소희로 2000년 정식 데뷔했다가 이후 이름을 개명해서 박소연으로, 이후 2004년에는 예명 박수빈으로, 이후 2010년에 금잔디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금잔디라는 이름은 동덕여대 철학과 교수님이 금잔디의 사주에 맞게 그냥 잔디도 아닌 금잔디처럼 파릇파릇하게 성장해 성공하라는 의미로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금잔디의 나이는 1979년 5월 15일생으로 올해 나이 42세입니다. 금잔디 고향은 강원도 흥천군이며, 가족으로는 부모님과 언니가 있습니다.

 

 

금잔디는 키 164cm에 혈액형은 B형이라고 하고요, 금잔디 종교는 불교이며, 학력은 흥천초등학교, 흥천여자중학교, 흥천여자고등학교, 동덕여자대학교 방송연예과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금잔디의 현재 소속사는 올라 엔터테인먼트 소속이라고 합니다. 

 

금잔디 과거 어린시절

 

 

금잔디는 어린 시절부터 트로트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고 합니다. 부모님이 태교로 트로트를 들었던 것은 물론, 옹알이까지 트로트로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후 금잔디는 6살 때 참가한 노래대회에서는 1등 상품으로 황소를 받는 등 당시 각종 동네 노래대회에서 상을 휩쓸어 집안의 가전제품이 그녀의 경품으로 채워졌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춘천에서 하는 어린이 동요대회에 나가보라는 권유를 받게 되어 출전해 최우수상을 받았다고 하며, 이후 KBS 강원 어린이 합창단에서 영입 제의가 들어와 합창단 활동을 위해 어머니와 매주 두 번씩 춘천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어머니가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하자 금잔디는 이후 초등학생의 몸으로 혼자 춘천을 찾을 정도로 열의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금잔디 : "저는 고향이 강원도 홍천입니다. 그 어린시절 저는 나훈아 선생님의 노래를 듣고 아 나도 트로트가수가 돼서 나훈아 선생님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금잔디 : "그래서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저는 트로트 외에 어떠한 음악도 하지 않았다. 대학교 때 밴드를 결성해 노래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트로트를 불렀다."

 

금잔디 : "그때 친구들이 뽕짝이라며 수준떨어진다고 놀렸지만 그런 친구들 중 한 명은 지금 트로트가수가 돼 있다. 너는 전통 트로트를 버릴 수 없다. 나이가 들면 여자 나훈아로 기억되고 싶다"

 

금잔디 가정사(가족사)

 

 

금잔디의 집은 어린시절부터 아버지가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 어머니가 대신 집안 살림을 꾸려나갔고, 그마저도 아버지로 인해 많은 어려움들을 겪었다고 합니다. 

 

금잔디 : "아빠가 다니시던 회사를 그만두시고 그때 개인택시 사업을 하셨어요. 그 당시에는 돈을 정말 잘 버셨어요. 그때 당시 개인택시가 굉장히 잘 됐어요. 드물었고, 그런데 제가 중학교 때 돈이 잘 되는 걸 조금 더 받을 수 있다는 걸로 해서 택시를 파신 거에요"

 

 

금잔디 : "빚을 조금 얹어서샀던 개인택시 마저도 아빠가 혼자 팔아버리고, 빚은 빚대로 남아 있고, 엄마 아빠한테 용돈을 안 받아 쓰는 게 맞는구나 그렇게 알고 지냈던 것 같아요"

 

금잔디 : "우리 아빠 같은 경우에는 다 해봤잖아요. 살림을 다 부수어도 봤고, 저희 집에는 식탁에 유리가 있을 수가 없었어요. 항상 그걸 아버지가 깼으니까요. 대체 왜 그러냐고 했더니 빚 독촉이 오는데 엄마가 해결을 안 해주니까 엄마한테 화풀이를 한 거래요."

 

금잔디 : "18 만원을 가지고 가서 화투를 치셔서 교복값을 다 잃고 오셨어요. 결국은 학교도 늦게 가면서 교복을 얻어 입고 갔어요. 그 다음 번이라도 경제적인 능력이 됐으면 새 교복을 해서 입었겠죠. 어떤 상황이었는지 제가 교복을 두 벌 다 얻어서 바꿔가면서 중학교 삼 년 내내 다녔어요."

 

그렇게 금잔디는 새 교복 한 번 입어보지 못하고 중학교를 졸업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도 아버지로 인해 집안은 바람 잘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금잔디 어머니 : "그 때 노름을 많이 했어요. 수입이 엉뚱한 곳으로 빠져버리니까 생활도 안되고 집고 저당 잡혀서 돈도 대출해서 쓰고 그랬어요. 마이너스 통장까지 다 썼어요. 나중에 그거(빚)를 막다가 안 돼서 사업을 부도처리 했어요."

 

금잔디 어머니 : "나는 TV에서 보는 그 빨간딱지를 그때 처음 봤어요. 10원 한 장 못 가지고 나왔으니까. 집에 압류 딱지 다 갔다 붙여서 물건도 가지고 나올 것도 별로 없었고, 우리 입는 옷만 가지고 나왔어요."

 

금잔디 : "아빠는 이 세상 나쁜 남자들이 하는 건 다 하셨으니까요. 폭력, 외도, 도박, 나쁜 남자들이 하는 건 다 하셨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금잔디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을 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자신이 어린시절 새 엄마로부터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에 딸 만큼은 자신처럼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랬다고 하네요. 

 

이후 금잔디는 아버지가 개인택시를 그만 둔 후 가족의 생계가 여려워져 돈을 벌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안해본 일이 없다고 하네요.

 

금잔디 : "노래에 소질 있는 분 연락 달란 구인광고를 보고 연락을 했고, 노래만 부르면 월급 150만원을 준단 말에 갔었는데 어르신들이 빼곡히 있었다. 정말 행복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불법으로 약을 파는 곳이었다. 그걸 알고 나선 못하겠더라"

 

이후 금잔디는 저녁에는 횟집 주방에서 쓰레기 정리하고 음식 정리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에는 스포츠 가게에서 일을 하며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금잔디는 2017년 비디오스타에서 "몇 개월 전까지 빚을 갚고 있었다. 아빠가 딸에게 말 못하고 숨긴 빚들이 너무 많았다. 다 합쳐 10억이었다. 처음에 빚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저를 위한 추억이 없아. 일만 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또한 금잔디는 2018년 리얼극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했습니다. 

 

금잔디 : "98년도부터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 계속 부모님의 빚을 갚아드리다가 2008년쯤에 개인적인 아빠 빚 독촉으로 인해서 집에서 부부싸움이 너무 심하게 일어나셔서 그때 500만원, 500만원, 500만원 갚은 게 저는 계속 허덕이고 계속 굶고 있는데 빚을 갚았어요."

 

금잔디 : "얼마 되지는 않지만 악착같이 벌어놓은 돈을 그렇게 해서 은행 빚을 갚았어요."

 

 

그리고 금잔디는 '이날 이때까지 남편이 단돈 200만원을 내 손에 안 쥐어 줘서 난 그게 너무 속상하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어머니 통장에 매일 얼마씩을 보내드렸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마저도 압류가 걸려서 찾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잔디는 한 달에 얼마 받아 보는 게 소원이라고 한 어머니의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용돈을 보내드렸는데 그 돈조차도 아빠 때문에 압류를 당하다보니 아빠가 정말 미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금잔디는 엄마를 생각해 집안(아버지) 빚을 다 갚아드렸다고 하네요.

 

금잔디 : "나중에 알고 보니 사채를 하나 쓴 게 2000만원이 안되는 돈인데 이자가 생겨서 1억에서 몇 백만원 빠졌어요. 엄마가 연대보증을 서고 아빠랑 동업하시는 분이 서로 맞보증을 서주셨더라고요"

 

금잔디 : "그런데 맞보증을 섰던 그 사람이 금잔디가 잘 되는 걸 알고 왜 돈을 안 갚냐. 딸이 잘 되고 있는데 왜 안 갚냐 라고 하면서 그렇게 해서 다시 압류를 걸고 고소를 하신 거에요. 제가 잘 되는 걸 알고 빚 독촉을 했어요."

 

금잔디 : "그래도 어쨌든 남의 돈이어도 이자가 크게 불어있어도 원금을 쓴 거는 아빠가 쓴 건 맞잖아요. 서로 보증을 서서 썼건 어쨌건 아빠가 진 빚이 맞다고 생각을 해서 두 분 다 편안하게 사실 수 있게 뭐든지 본인들의 명의로 사실 수 있게 하자" 

 

금잔디 : "마지막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자 해서 2016년도에 빚을 다 갚았어요. 3금융에서 연락 왔던 그 빚을 깔끔하게 다 갚아드린 거니까 1998년도부터 2016년도까지였으니까 거의 18년 부모님 빚을 갚아드린 거죠"

 

금잔디 데뷔 이후 무명시절 생활고

 

 

금잔디는 가수로 데뷔하기 전 전국노래자랑 출연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이후 금잔디는 2000년 국제공항에서 열린 오디션을 통해 영종도 갈매기로 데뷔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합니다.

 

 

이후 금잔디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여덟 군데 업소에서 밤무대 일하다가 한 매니저 분을 만나게 되었고, 이후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을 겪게 되면서 10여 년간 긴 무명 생활을 이어가게 됩니다. 

 

금잔디 : "첫 번째 음반은 실패했지만 절망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내가 부족하고, 더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니다. 하지만 두 번째 앨범(2005년)이 매니저의 사기 때문애 활동조차 해보지 못하고 엎어졌을 때는 너무 절망적이었다."

 

금잔디 : "박수빈이라는 새 이름으로 새로 시작하겠다는 각오가 대단했는데, 그만큼 충격 역시 컸다. 결국 우울증까지 앓았다. 사기사건 이후에 4-5년간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했다."

 

금잔디 : "짜파게티 하나와 옥수수 2개로 사흘을 버틴 적도 있었다. 어떤 날은 지인이 준 막걸리 한 병으로 하루를 때운 적도 있었다."

 

 

마지막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짜리 집에 살고 있을 때는 무슨 일로 500만원을 다 까먹게 되고 나서 아침에 해 뜨는 게 두렵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금잔디 : "해 뜰 때가 너무 무서워요. 해가 뜨면 집으로 주인아주머니가 찾아오니까.. 제가 해 뜨는 게 무서워서 항상 이불로 창문을 다 가려놓고 지냈어요. 낮이 언제 가는지 모르게 해놓고 있다가 해가 지는 시간이 되면 그때 밖에 나갔어요."

 

 

금잔디 : "찜질방에서 버틸 때 거기 오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 삶은 계란에 그런 게 맛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삶은 달걀을 놓고 먹으면 나는 옥수수를 사서 그거를 정말 배가 너무 부른데 옥수수를 간식으로 먹는 듯이 그 먹는 듯 표정을 지어야 했을 때 속상했어요."

 

금잔디 : "그때부터 익숙해졌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남들 시선이 많이 의식됐어요. 내가 굶는 건 괜찮고 내가 이렇게 힘든 건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초라하게 보지는 않을까. 나를 어떻게 볼까. 이런 게 많이 의식 됐었어요. 그때 옥수수로 끼니를 채워야 할 때 가장 힘들었어요"

 

금잔디 무명생활 청산 이후 근황

 

 

금잔디는 이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 이때는 다행히 먼저 번의 사기꾼들이 아닌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금잔디 : "최지웅 홍보이사님은 당시 제가 밀린 월세 때문에 방에서 쫓겨날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는 본인의 귀중품들을 그 자리에서 팔아서 돈을 줬어요. 그리고 최지웅 홍보이사님이 김대표님도 소개해줬죠. 자신보다 더 나은 적임자라고 하면서요"

 

금잔디 : "김대표님은 정말 돈 한푼 없이도 방송국 피디들을 잘 만나러 다녔어요. 그런데 계약하자던 김대표가 이후에 3개월간 잠적했다가 다시 나타났어요."

 

금잔디 : "알고 보니 직전에 만든 앨범이 망했더군요. 그래서 저보고 좋은 사람 만나서 음반내라고 했어요. 저는 없는 사람들끼리 일 한 번 내보자고 했고요"

 

결국 이 세 사람이 뭉쳐서 고속도로 트로트 앨범을 내게 되었고, 이것이 대박을 치게 된 것입니다. 바로 2012년에 발표한 오라버니였는데요, 이 노래로 금잔디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대박을 치며 무명생활을 청산하고 본격적으로 고속도로 여왕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후 금잔디는 2014년 제 13회 대한민국 전통가요대상 여자가수부문 우수상과 2014년 MBC 가요베스트 인기상을 수상ㅎ했습니다.

 

 

금잔디는 그동안 오라버니, 여여, 어쩔 수 없는 사랑, 천년지기 등 히트곡을 남겼는데요, 가창력, 외모, 화려한 무대 매너를 겸비해 여러 연령층에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휴게소 음반 시장에서 누적 판매량 100만 장이 넘을 만큼 큰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그동안 앨범 판매량이 300만장을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또한 금잔디는 행사만 한달에 100여개를 다녀 화제가 되기도 했었는데요, 20억이 넘는 집안 빚을 갚기 위해 그렇게 뛰었다고 합니다. 

 

금잔디는 가수 활동 외에도 여러 방송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는데요, 과거 드라마 사랑과 전쟁2에도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동덕여대 방송연예과 출신이라 그런지 연기 초보자임에도 당시 민지영과 연적 관계 역할을 무난히 소화해 내며 연기 합격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금잔디는 썰전, 여유만만, 비타민, 기분 좋은 날, 불후의 명곡, 가족의 품격 풀하우스, 애정통일 남남북녀, 노래싸움 승부, 비디오스타 불타는 청춘, 아궁이, 복면가왕, 사랑의 콘센터, 트로트의 민족, 화요일은 밤이 좋아 등 다양한 방송을 통해서도 꾸준한 활약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금잔디 수상 경력>

  • 2011년 제19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성인가요 우수상
  • 2012년 제19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성인가요 신인가수상
  • 2012년 제12회 대한민국 전통가요대상 음반공로상
  • 2014년 제22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성인가수 대상
  • 2014년 한국을 빛낸 사람들 대상 인기가수대상
  • 2014년 MBC가요베스트 인기상
  • 2014년 제13회 대한민국 전통가요대상 여자가수부문 우수상
  • 2020년 제1회 트롯어워즈 트롯100년 여자 베스트 가수상

금잔디 성형 수술

 

 

 

금잔디는 무명가수 시절 대대적인 성형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10년 동안의 긴 무명생활이 이어져 소속사에 일방적으로 계약 파기를 당해 우울증에 걸리면서 폭식을 하게 됐고, 허벅지가 24인치가 될 정도로 몸이 불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후 금잔디는 자신감을 되찾고 싶어 대대적인 전신성형을 감했하게 되었는데요, 과거 SBS E!TV 뷰티 솔루션 이브의 멘토시 에서 세 번째 주인공으로 뽑혀 가슴과 얼굴 성형, 지방흡입 등 전신성형을 진행했습니다. 당시 금잔디는 외모 컴플렉스가 심했다고 하네요.

 

금잔디 : "과거 우울증에 걸렸을 때 폭식을 하면서, 허벅지가 24인치나 되었을 정도로 몸이 불었다. 그래서 자신감을 되찾고 싶었다. 튼튼한 하체 외에도 A컵도 안되는 빈약한 가슴이 고민이었다."

 

금잔디 : "과거에 무대 의상으로 입었던 톱이 흘러내려가는 사고가 발생할 뻔 하기도 했다. 당시 가슴 한 쪽에 양말 세켤레를 넣어서 방송사고를 면했다."

 

이후 금잔디는 무대 공포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데 성공합니다. 

 

금잔디 공황장애 겪기도 해

 


그런데 금잔디는 2016년 아버지의 빚을 거의 다 갚아갈 때쯤 2015년 3월부터 10개월 동안이나 공황장애를 겪는 시련을 겪기도 합니다.

 

금잔디 : "전 항상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려놔요. 올해는 무엇을 할 거고, 내 다음 목표는 이것이고, 하고 그림을 그려놓는데 3월 1일경에 나름대로 세워놨던 제 인생의 목표가 거의 성립이 된 날들이었어요. 3월 초가, 그리고 나서 3월 12일에 병(공황장애)가 온 거에요." 

 

금잔디 : "그냥 두통부터 시작을 했어요.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아프길래 감기가 왔나 했는데, 내일 스케줄 있으니까 오늘 빨리 감기약을 먹고 쉬어야겠다 하고 감기약을 먹고 누웠는데 누운 동시부터 일어나지도 못하겠고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고 그랬어요."

 

금잔디 : "제가 눕는 방향대로 심장이 조이기 시작하는 거에요. 부산까지 차를 타고 가는데 갑갑증이 나고 그러는거에요.가는 도중 차가 계속 몇 번을 섰어요."

 

금잔디 : "그래서 그때부터는 비행기로 갔다 오고, 갔다 오고, 오래 탈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비행기를 타도 고도가 높아지면 심장이 너무 조이는 거에요. 그래서 승무원들 지나가고 나면 양해를 구하고 바닥에 누웠어요."

 

 

금잔디 : "이거를 몇 번을 반복하면서 스케줄을 왔다갔다 한거에요. 방송에서 모습을 보면 아무도 제 속은 안 보이는 거에요. 저는 속에서 요동을 치고 있는데 아무도 몰랐어요"

 

금잔디 : "제가 10층에 사는데 밖을 내다보며 울고 있었다. 떨어지면 아플까 생각했다. 매니저 오빠 두 명이서 불침번을 섰다. 내가 뭘 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금잔디는 당시 하루 3천킬로를 뛸 정도로 스케줄이 빡빡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픈데도 병원갈 시간도 없었다고 하네요. 정말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금잔디 공황장애 극복 이후 근황

 

 

그러다 고속도로에서 잠깐 쉬는데 어르신들에 TV에서 노래하는 가수를 보고 즐거워하며 화면 속 가수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 가수가 바로 금잔디였다고 하네요. 

 

금잔디 : "아~ 나를 보고 저렇게 즐거워하고 좋아하시는 어르신들이 계신데 힘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뀌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물론 몸도 덜 아팠다. 그날부터 몸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금잔디는 그렇게 병을 극복하니 임창정에게 좋은 곡도 받고 정규 3집도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싱글과 메들리, 옴니버스, 그리고 정규 4집까지 꾸준히 앨범을 발매, 이외 여러 방송을 통해서도 활약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금잔디 결혼 남자친구 이상형

 


금잔디 결혼에 대해서는 결혼 남편 등의 관련 검색어가 뜨기도 하는데요, 금잔디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미혼이며, 현재 남자친구 여부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방송을 통해 알려진 바로는 아직 없다고 합니다. 대학시절 두 차례 남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을 뿐 가수 데뷔 후에는 철저히 혼자라고 하네요.

 

금잔디 : "나는 이미 트로트와 결혼했다. 오로지 트로트와 가족만 생각하는 것도 벅차다. 이대로 한 남자의 사랑을 받지 못해도 좋다. 사실 연애를 마지막으로 한 것도 벌써 7-8년 전이다."

 

 

금잔디 : "하지만 내 음악으로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치유받는 팬들이 많은 게 더 좋다. 이미 결혼 적령기를 넘겼지만,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다"

 

금잔디는 이제까지 남자나 결혼 등에 대한 것은 생각도 못해봤다고 합니다. 이유는 아빠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고 하네요. 엄마처럼 살게 될까봐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라고 하네요. 

 

금잔디 : "나는 비혼주의자다. 남자친구도 두 번 정도 사귀어 봤지만 남자친구를 사귈 때마다 족쇄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혼자 즐길 수 있는 시간이 행복하다. 이 상태가 좋다"

 

 

금잔디는 누군가에게 맞추면서 산다는 게 엄두가 안 나기도 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 것도 싫고, 성격상 상처를 주는 건 더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 금잔디는 방송을 통해 공개구혼까지 합니다. 

 

금잔디 : "그냥 열심히 일밖에 모르고 살아왔다. 공개구혼이라고 하니 굉장히 떨린다. 그냥 금잔디가 부족한 점이 있다면 이걸 좀 채워줄 수 있는 남자분을 만나고 싶다"

 

 

금잔디는 또 자신의 이상형에 대해서는 과거 한 방송에서 "나만 보는 사람이 좋다. 아주 잘생긴 사람은 싫다. 백일섭을 자신의 이상형이었다. 내가 좀 작아보이는..."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후 다른 한 방송에서는 "마지막 남친이 문경 분이었닥. 문경 사람이었던 남자친구 이후 14년간 연애를 하지 못했다. 이서진씨 같은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금잔디는 한때 백일섭을 시아버지로 모시고 싶어 백일섭과 인연이 닿을 방법을 찾던 중 지인에게 백일섭의 아들을 소개받았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그가 이미 유부남이라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금잔디는 이후 장민호와 열애설이 나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금잔디는 "남자로서는 느낌이 전혀 없다. 장민호도 여자한테 별로 관심이 없다. 오로지 일에만 관심이 많다"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상형 월드컵에서 "냉정하고 남자다운 스타일을 좋아한다."며 영탁을 최종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금잔디는 "사랑의 콜센타 촬영장에서 만나 대화를 하게 됐는데, 영탁에세서 후광이 보이더라. 그동안 조여져 있던 게 다 풀어진 느낌이었다. 너무 신기한 게 다 열리니까 영탁의 곡 쓰는 아이디어라든지, 무궁무진한 능력을 보며 깜짝 놀랐다. 이 정도일 줄 알았다면 친해질 걸 그랬다"라고 호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상 가수 금잔디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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