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배우 겸 제작자 송승환이 7월 25일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에 출연합니다. 

 

송승환

 

이번에 2024 파리 올림픽에서도 개 폐막식 해설을 맡은 송승환은 이번 올림픽의 관전 포인트들을 나열합니다. 이어 그는 현재 하계 올림픽에서 96개의 금메달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이번 올림픽에서 100번째 금메달에 도전한다는 사실도 전해 기대를 높입니다. 

 

또한 송승환은 1965년 데뷔한 후 아역 시절뿐 아니라 젊음의 행진, 밤을 잊은 그대에게 진행자로서, 그리고 당대 인기 드라마와 연극의 주인공을 도맡아 했던 전성기 시절을 되돌아봅니다. 

 

송승환은 디스코텍 DJ로도 활동하며 석 달 출연료가 아파트 한 채 값이었을 만큼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돌연 미국으로 떠나 궁금증을 자아낸 바 있는데요, 그는 그 배경으로 부모님의 빚을 갚느라 그동안 번 돈을 모두 날리게 된 남모를 속사정을 털어놓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후 본격적으로 제작자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 그는 가수 강수지의 데뷔 음반부터 전 세계의 사랑을 받은 비언어극 난타까지 제작한 인생 제 2막의 성공담을 공개합이다.

 

 

송승환 프로필 나이 고향 가족 키 학력 

 

송승환

 

배우 송승환은 1957년 1월 10일생으로 올해 나이 67세입니다. 송승환 고향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이며, 가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송승환은 키 174cm에 몸무게 69kg이라고 하며, 학력은 서울보성중학교, 휘문고등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 중퇴, 이후 명예졸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송승환은 배우 겸 공연 기획자, 연출가, 대학 교수로, 현재 PMC프러덕션 예술총감독을 역임하고 있고, 이번에 개 폐막식 해설위원을 맡고 있는데요, 이번 2024 파리올림픽 개폐막식 해설위원도 맡게 됐습니다. 

 

송승환 과거 아역 데뷔 활동

 

송승환

 

송승환은 1965년 9살의 어리 나이에 KBS 아역 성우로 데뷔한 이후 김수현 작가의 작품에 자주 출연했던 배우로, 휘문고등학교 재학 시절 손석희와 방송반 동기로 함께 활동을 했으며, 가수 이용도 고등학교 동기라고 합니다.

 

송승환이 배우로 데뷔하게 된 계기는 선생님의 추천으로 어린이 동화구연대회에 나가 1등을 하게 되어 KBS 라디오에 출연, 라디오 프로그램 녹음이 끝나자 피디가 이것저것 대본을 읽어보라고 시키더니, 어린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않겠냐고 해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 운동신경도 좋지 않아 공놀이나 딱지치기 심지어 구슬치기도 못했고 유일하게 재미있어 했던 것이 책읽기였던 송승환이었기에 당시 아역 성우일이 너무 재미있었다고 합니다. 

 

송승환은 그렇게 1965년 아역성우로 데뷔한 이후 자연스럽게 연기도 시작, 이후 드라마 똘똘이의 모험, 얄개전, 그 머슴애, 딸, 아씨, 여로, 달려라 삼총사 등 다수의 작품을 통해 활약합니다. 

 

 

송승환 과거 집안 아버지 사업실패와 빚으로

하지만 송승환의 중학교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때때로 빚쟁이들이 집으로 쳐들어와서 방에 드러눕기도 하고, 또 송승환의 출연료 역시 고스란히 빚을 갚는데 나갔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쌀이 없어서 굶기도 하고, 미아리 산동네에서 살기도 했으며, 집에 전화가 없어 방송국에서 출연 섭외 전화가 동네에 하나 있던 약국으로 걸려오면 약사 아저씨가 슬리퍼를 끌고 달려와서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실 송승환은 고등학교 때까지 연기를 취미 생활로 여겼고, 그래서 대학 가서는 생계를 위해 새로운 일을 할 생각으로 재수까지 하면서 한국외국어대 아랍어과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당시 중동 건설 바람이 불던 때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아랍어과에 대한 관심이 높던 때라 송승환 역시 처음에는 중동을 누비는 사업가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송승환 다시 시작한 연기활동과 전성기

 

 

하지만 송승환은 2학년이 되었을 때 부모님이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방송 일정 때문에 자퇴를 하고, 다시 극단으로 돌아가서 연기를 새로 시작하게 됩니다. 

 

송승환 : "당시에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다. 내가 배우로 인생을 산다면 어떻게 살까? 혹은 내가 공부한다면 어떤 미래가 될까? 이런 식으로 노트에 막 쓰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였다"

 

이후 송승환은 청춘스타로 성장, 정윤희뿐만 아니라 장미희, 유지인 등의 트로이카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되었고, 1977년부터 1988년까지 극단 76극장의 단원으로 활약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가운데 송승환은 하이틴 스타답게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청소년들이 많이 보는 각종 프로그램의 MC를 자주 맡기도 했습니다. 

 

송승환이 진행한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는 1981년 KBS2에서 방영됐던 젊음의 행진을 꼽을 수 있는데요, 이외에도 라디오 프로그램 별들의 합창, 송승환의 음악앨범 등과 예능 프로그램 100분쇼, 두드림쇼 등이 있습니다.

 

 

승승환은 특히 젊음의 행진 MC를 맡았을 당시 배철수 감전 사고를 수습한 장본인이기도 한데요, 당시 그는 배철수가 쓰러지자 황급히 뛰어나와 생방송 도중에 감전사고가 났다며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스태프들도 충격을 받아 얼음처럼 굳어있는 걸 보고 본인이라도 정신차려야 한다는 생각에 마이크를 다시 잡고 아무 말이라도 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송승환은 디스코텍 DJ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석 달 출연료가 무려 아파트 한 채 값이었을 만큼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송승환 미국유학 이유

 

 

 

그런데 그렇게 연기와 MC 활동 등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송승환은 1985년 6월 돌연 미국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송승환은 당시 서울에서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나 할리우드 영화를 마음껏 보기 힘든 상황이라 문화적인 갈증이 심했던 상태였던데다, 자신이 번 돈을 매번 아버지 사업에 쏟아붓고 나니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다 젊을 때 더 많이 보고 느끼는 것이 나중에 더 큰 재산이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인데요, 미국행 당시 송승환이 아내와 함께 가져간 돈은 고작 3천 달러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송승환 : "20대 후반, 4년 정도 만났던 여자 친구와 비밀 약혼식을 치른 뒤 미국으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가족들끼지 조촐한 예식을 올리기로 했는데, 약혼식 축가를 맡은 해바라기 이주호가 얼떨결에 언론사 기자한테 송승환의 약혼식을 가야 해서 바쁘다라고 했다."

 

송승환 : "그 바람에 신문에 기사가 났다. 당시 갑작스러운 비밀 약혼식과 미국행 소식에 뿔난 팬들이 항의성 물건들을 보내오기도 했다."

 

 

송승환 : "전성기 시절 뉴욕행을 결심한 이유는 사업을 하시던 부모님의 빚을 모두 해결하고 홀가분하게 떠난 것이다. 뉴욕에서 지금의 아내와 함께 생계를 위해 좌판을 깔고 장사까지 했다."

 

송승환 : "경마장 주차장에서 좌판에 시계를 놓고 팔았다. 한 개에 4달러 정도 했던 시계를 하루 1천 달러까지 판적도 있다. 함께 고생했던 아내가 있었기에 난타라는 작품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송승환 복귀 이후 활동

 

 

이후 송승환은 1987년 귀국하여 아내와 결혼식을 치루고, 이후 공부를 마무리한 뒤 다시 연기를 하면서 쇼 특급 MC, 가요톱10(1992~1993년), 이외에도 퀴즈 집중탐구 세기의 걸작, 빅 브라더스, 한밤의 데이트, 연예특급, 문화 산책, 댄싱 위드 더 스타 2, 스타 패밀리 송, 송승환의 초대 등의 방송 진행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수의 CF 광고와 라디오방송 진행을 맡기도 했으며, 세계를 난타한 남자 문화 CEO 송승환, 창의력 소년 송승환 세상을 난타하다 등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송승환은 이외에도 제작자로 변신, 가수 강수지의 데뷔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고, 뮤지컬 퍼포먼스인 난타를 총지휘하면서 1998년 한국 뮤지컬대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1989년~1995년까지 환 퍼포먼스 대표로, 1996년부터 2012년까지 PMC 프러덕션 창립 대표이사로, 2005~2010년까지 명지대학교 영화 뮤지컬학부 부교수로, 2010~2012년까지 성신여자대학교 융합문화예술대학 학장으로, 2011~2012년까지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을 재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송승환은 2015년 7월에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 폐회식 총감독을 맡기도 했고, 그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올림픽 개폐회식의 해설위원으로 나서기 시작, KBS에서 2020년 하계 올림픽과 2022년 동계 올림픽 개폐회식 해설위원을 맡기도 했고, 이번 2024 파리 올림픽 개폐회식 해설위원도 맡게 된다고 합니다. 

 

참고로, 송승환은 2015년 7월에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 폐회식 총감독으로 선임되면서 그의 커리어에 비해 빅이벤트 개회식, 폐회식을 총괄하는 것이 우려된다는 시각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에 소위 최순실 게이트의 차은택 라인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막상 공개된 개회식과 폐회식은 한국의 전통과 문화, 현대를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성공적인 개회식이 되었고, 그의 경력에도 난타를 뛰어넘을 경력으로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송승환 망막색소변성증과 실명 근황

 

 

한편, 송승환은 평창올림픽이 끝난 직후 황반변성 및 변형된 망막색소변성증이 발생해서 현재는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수준(시각장애 4급 판정)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송승환은 현재 1997년 이후 지금까지 공연 중인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의 제작사로 알려진 PMC프러덕션에서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고 하네요. 

 

사실 지난 2018년 올림픽이 끝난 후 공연계에선 그의 시력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았었는데요, 모니터의 강한 빛 때문에 안압이 높아져 시신경이 망가졌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전세계 수억명 시청자를 겨냥한 올림픽 개 폐회식을 만들며 총감독의 시선이 모니터에 집중됐을 테니 제법 그럴싸한 해설이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그가 활발한 강연 활동에 이어 연기 활동까지 재개하자 소문은 쑥 들어갔다고 합니다

 

승승환 : "올림픽 때문이 아니에요. 모니터를 많이 봐서도 아니고요. 병명이 두 가지 나왔는데 하나는 황반변성이고, 다른 하나는 변형된 망막색소변성증이에요. 유전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하네요"

 

송승환의 눈에 증세가 나타난 건 올림픽 폐회식 직후, 평창의 혹한에 시달린 그가 따뜻한 날씨를 찾아 난타 전용관이 있는 태국 방콕으로 쉬러 갔을 때였다고 합니다.

 

갑자기 사람 얼굴이 흐릿해졌고, 휴대전화의 글씨가 안 보였다고 하네요. 이에 깜짝 놀라 귀국을 서둘렀고, 이후 원인과 치료법을 찾으러 국내 양 한방 병원은 물론, 일본과 미국의 병원까지 다녀왔다고 합니다. 

 

송승환은 떨어진 시력을 보완할 방법을 여럿 고안했다고 합니다. VR(가상현실) 기기에 평볼록렌즈를 끼워 넣어 모니터 영상을 또렷이 볼 수 있는 도구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의 아이디어를 연극 소품 제작 스태프가 구현해낸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휴대전화 문자를 읽을 수 없는 그는 아이폰의 화면 말하기 기능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시각장애인 지원센터도 찾아가 조언을 구해 그곳에서 알려준 대로 독일제 OCR(광학문자판독)기기도 구입했다고 하는데요, 이 기기는 글자가 적힌 종이를 기기 위에 올려놓으면 음성으로 변환해 읽어주는 도구라고 합니다.

 

송승환 : "처음엔 불편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눈으로 보며 외우는 것보다 더 속도가 빠르던데요. 상대 배우 얼굴은 안 보여요. 하지만 연기는 어차피 상상력으로 하는 거잖아요. 안 슬퍼도 슬픈 척, 안 아파도 아픈 척, 그러니까 안 보여도 보이는 척하는 거죠"

 

송승환은 지난 2018년 연기를 쉬는 동안에도 별주부전을 각색한 어린이 뮤지컬 더 스토리 오브 언더더씨를 만들어 지난해 공연한 바 있고, 또 난타를 이을 새로운 넌버벌 퍼포먼스 더 스페이스를 준비하기도 했답니다.

 

송승환은 앞으로도 눈이 보이는 한은 계속 연기하고 작품을 연출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는데요, 다행히 현재는 시력이 나빠지던 게 진행이 멈춘 상태라고 합니다. 

 

송승환은 지금도 PMC프러덕션에서 예술감독을 맡고 있고, 연기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 작품으로는 드라마 라켓소년단(2021)과 주말연속극 삼남매가 용감하게(2022)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종 여러 방송에도 출연하고 있는데요, 이번에 2024 파리올림픽 해설위원을 맡게 되면서 이번에는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에 출연하게 되었네요. 

 

<송승환 수상 경력>

-1968년 동아 연극상 특별상 (극단 광장 학마을 사람들)

-1982년 제21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남자최우수연기상 (극단 실험극장 에쿠우스)

-1994년 서울연극제 남자연기상 (극단반도 영원한 제국)

-1998년 동아 연극상 작품상 ((주)피엠씨 프러덕션 남자충동)

-1998년 한국 뮤지컬 대상 특별상 ((주)피엠씨 프러덕션 난타)

-2005년 올해의 예술상 ((주)피엠씨프러덕션 벽속의요정)

-2006년 타워상 (러시아 정부 수여)

-2006년 한국 CEO 그랑프리 문화 CEO 상 수상

-2007년 제13회 한국뮤지컬 대상 프로듀서상

-2007년 제56회 서울시 문화상 연극분야 수상

-2008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2008년 서울관광대상 수상

-2009년 외대를 빛낸 동문상 수상

-2012년 대중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 수상

-2015년 제4회 예그린어워드 예그린상

-2019년 체육훈장 맹호장

 

<송승환 경력 사항>

-1989년 환 퍼포먼스 대표

-1997년 ~ 2012년 3월] PMC프러덕션 공동대표이사

-1997년 뮤지컬 퍼포스 난타 총지휘

-2002년 문화산업포럼 공동대표

-2005년 3월 명지대학교 문화예술학부 교수

-2009년 4월 제주특별자치도 문화홍보대사

-2010년 7월 DMZ다큐영화제 조직위원

-~ 2010년 8월 명지대학교 영화뮤지컬학부 교수

-2010년 9월 성신여자대학교 융합문화예술대학 학장

-2010년 9월 ~ 2018년 6월 성신여자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2011년 1월 제2대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

-2011년 2월 제92회 전국체육대회 개폐회식 총감독

-2012년 3월 ~ PMC프러덕션 예술총감독

-2012년 7월 제1회 서울뮤지컬페스티벌 조직위원장

-2012년 ~ 2015년 삼성카드(주) 사외이사

-2012년 11월 구세군 자선냄비 홍보대사

-문화융성위원회 위원

-2015년 3월 ~ 2018년 2월 세종문화회관 이사회 선임이사

-2015년 7월 ~ 2018년 2월 제23회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

-2015년 ~ 2016년 국민경제자문회의 혁신경제분과 위원

 

송승환 결혼 아내(부인) 박찬실 나이(차) 직업, 누구?

 

송승환

 

송승환은 아내 박찬실과 1987년 8월 8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송승환과 아내(부인) 두 사람의 나이차는 동갑이라고 하구요, 당시 송승환 아내(부인) 직업은 네일아트 종업원이었다고 합니다.  

 

 

송승환 아내(부인) 박찬실 결혼스토리 

송승환은 미국으로 가기 전인 1981년 아내를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당시에 송승환은 젊음의 행진 MC를 보고 있었는데, 자주 가던 카페의 단골 손님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와 우연히 합석하게 되었고 볼수록 마음에 들어 이후 진지하게 만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약 4년을 사귀다가 약혼만 한 상태에서 1985년 미국 유학을 같이 떠나게 되었는데요, 당시 송승환은 가난한 상태였고, 아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송승환

 

송승환 : "어려울 때 아내에게 많이 기대게 되면서 생각보다 결혼을 빨리 하게 됐다. 그때 아내의 가족들도 미국 이민을 가 계셨다. 그래서 약혼식을 하고 같이 미국에 가게 됐다."

 

송승환 :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지만, 제 인생에서 행복했던 시기다."

 

송승환 : "미국에서 저는 노점상으로 시계나 신발을 팔았고, 집사람은 네일 아트숍에서 일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끼니는 대충 해결하고, 틈만 나면 집사람과 함께 브로드웨이로 달려가서 연극을 봤다."

 

송승환 : "어느날은 노점에서 신발을 팔고 있는데 어떤 젊은 여자가 "혹시 송승환 씨 아니세요?"라고 묻더라. 맞다고 하니까, 그 분이 측은한 눈빛으로 저를 보면서 정말 용감하시네요 라고 하는 거다. 아마 잘 나갔던 연예인이 노점이나 하고 있었으나 그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송승환 : "하지만 저는 제 처지가 비참하거나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신발을 판 돈으로 끼니를 대충 때우고, 남은 돈으로 아내와 연극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더 행복했으니까"

 

송승환 : "그러다 뉴욕 한국 방송이 생겨서 아르바이트로 DJ를 하면서 생활했다."

 

이후 송승환은 1987년 일시 귀국해서 박찬실과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약 1년 정도의 문화 유학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송승환 아내(부인) 박찬실 자녀 근황

참고로 송승환에게 아이(자녀)는 없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한때 송승환 이혼, 송승환 재혼 등의 루머가 퍼지기도 하는데, 이에 대한 송승환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송승환 : "아이가 없어서 무자식 상팔자다. 일부러 안 낳은 건 아니고, 낳으려고 했는데 잘 안됐다. 인위적인 노력 없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송승환 재산 규모

 

송승환-재산

 

한편 송승환의 재산 규모가 준재벌로 비유돼 눈길을 끌기도 했는데요, 과거 제작한 공연 난타를 미국에 400만 달러(한화 약 52억원)에 수출한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송승환은 "준재벌은 아니고 먹고 사는 거 걱정은 안 하니 다행"이라고 겸손히 정정하면서도 "많이 드시라 제가 사니까"라며 밥 값 계산을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송승환은 한 방송에서 이와 관련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송승환 : "난타로 벌어들인 수익으로 돈방석에 앉았다느니 재벌이 됐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은데 회사는 성장했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돈을 많이 가지게 된 것은 아니다."

 

송승환 : "제 부인이 방송에서는 맨날 송승환 성공, 난타 수익 얼마 이렇게 나오는데 왜 돈은 가져오지 않냐고 해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송승환 : "난타로 성공했지만 또 다른 작품에 계속 투자를 하다보니 내 개인적인 돈은 얼마 없다. 사실 난타로 벌어들인 수익은 내가 연예인을 계속 꾸준히 했을 때의 수익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덜하다."

 

이번에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에 출연하게 된 송승환인데요, 앞으로도 건강한 몸으로 활약 이어가는 모습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배우 송승환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