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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패티김이 11월 18일 KBS2 불후의 명곡에 출연합니다.

 

 

이날 방송은 불후의 명곡 in US 특집으로 꾸며진 가운데 패티김을 응원하기 위해 패티김의 두 딸과 손주들이 깜짝 등장, 방송을 통해 최초 공개됩니다. 

 

패티김의 두 딸인 정아와 카밀라가 자리해 엄마를 향한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손주들은 할머니 사랑해요 라고 외쳐 공연장을 훈훈하게 물들입니다. 

 

이번 특집에서 패티김은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사랑은 생명의 꽃,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등 자신의 히트곡 퍼레이드를 비롯해 마이웨이를 소화하며 감동을 선사합니다. 

 

이날 방송으로 패티김 나이 프로필 가족 근황 등 관심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가수 패티김에 대해 알려진 정보를 모아 정리해 보았습니다 .

 


패티김(가수) 프로필 본명 나이 고향 가족 키 종교 학력 소속사

 

 

가수 패티김의 본명은 김혜자입니다. 데뷔 당시 예명은 린다 김이었는데, 이후 1959년 1월 초 미국 가수 패티 페이지와 같은 명가수가 되고 싶다는 뜻에서 현재의 예명인 패티김이라고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패티김 나이는 1938년 2월 28일생으로 올해 나이 85세입니다. 패티김 고향은 경기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인사정(현 종로구 인사동)이며, 가족으로는 남편 아르만도 게다니와 딸 정아 게다니 윌리엄스(1968년생), 카밀라 게다니(1978년생)가 있습니다. 

 

패티김은 키가 168cm에 혈액형은 B형이라고 하고요, 종교는 개신교(침례회)이며, 학력은 중앙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패티김의 현재 소속사는 PK 프로덕션 소속입니다.

 

패티김(가수) 프로필 

패티김은 1956년 김혜자라는 본명으로 국무총리배 판소리 경연대회에서 입상, 이후 3년이 지나 1959년 미8군 무대에서 가수로 데뷔, 초우, 이별,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사랑은 생명의 꽃, 서울의 찬가, 못잊어, 그대없이 못살아, 살짜기 옵서예, 사월이 가면 등의 곡을 남깁니다.  

 

패티김은 전설적인 디바이자 아티스트로, 한국형 팝보컬의 선구자이자 한국 대중가요계 역사의 숱한 최초의 타이틀을 기록한 인물로, 뛰어난 무대 매너와 트렌디한 스타일링, 팝을 기반한 보이스 색깔과 넓은 음역대를 구사하는 드라마틱한 가창력으로 격조 높은 보컬리스트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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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김(가수) 집안 과거

 

 

패티김은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나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패티김 : "어머니는 그 옛날 시절에 숙명여전을 3년 다니신 엘리트셨어요. 어머니를 떠올릴때면 아침마다 곱게 빗은 머리에 깨끗한 모시 저고리 입고 신문을 보시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올라요."

 

 

패티김 :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하셨지만 제가 가수가 된다는 것을 심하게 반대하셨지요. 어머니가 주로 저를 감싸 주셨죠."

 

패티김 : "어렸을 때는 꿈이 자꾸 바뀌었어요. 열세 살 때는 선생님이 되고 싶고, 또 한때는 간호사가 되고 싶기도 했어요. 당시 조혼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결혼 얘기가 나오면, 난 외교관과 결혼할 거야 라는 말도 했고요."

 

패티김 : "아무래도 외교관과 결혼하면 외국을 많이 다니게 되니까...그게 제 꿈이었죠."

 

이후 패티김은 중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국악을 배우게 됩니다.

 

패티김 : "2년 동안 국악을 정식으로 배웠다. 그 당시 국악을 배우면서 내 음악 기초 지식을 단단히 쌓았다. 그때 목청이 트였다. 특히 고음처리하는 법을 그때 터득했다. 그러면서 전국 국악 콩쿨 대회에서 1등도 해봤다."

 

패티김 : "하지만 아버지께서 많이 반대하셨다. 거기에 빠지면 나중에 기생이 된다 하고 하셔서, 결국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악을 포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패티김은 국악과 (훗날 배울) 성악의 발성을 기초로 자신만의 창법을 만들어내게 되었고, 이것은 훗날 그녀를 최고 가수로 만들게 됩니다. 

 

패티김(가수) 데뷔 계기

이후 패티김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처음에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우연한 기회를 통해 노래를 시작합니다. 

 

패티김 : "고등학교 졸업 후에 스튜어디스나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서 명동에 취직 자리를 알아보러 다녔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음악을 좋아하던 오빠 친구를 만나게 되었죠."

 

패티김 : "저, 취직 자리 구하고 있어요하고 했더니, 너 노래하지 않을래? 라고 묻더라고요. 그 순간 제 귀가 뭔가 뻥 뚫히는 것 같았어요."

 

패티김 : "결국 오빠 친구 소개로 미8군 클럽에서 노래를 시작했어요. 처음 6개월간은 견습생활 기간을 거쳤고, 1959년 3월부터 정식 가수로 활동하게 되었죠."

 

그리고 상대가 모두 미국인이라 김혜자라는 본명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고민 끝에 결국 패티 페이지의 이름을 따서 이름(예명)을 패티김으로 바꾸어 활동합니다. 

 

 

패티김 : "1960년까지는 주로 주한미국 클럽을 다녔고, 그리고 61년부터 62년 중반까지는 동남아시아 해외 공연을 하고 다녔어요. 그러다가 한국 대중들에게 처음으로 패티김 리사이틀을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당시 저를 외국에서 살다 온 여자로 착각하셨어요."

 

 

패티김 : "사실 제 키인 168cm가 지금은 아담한 사이즈인데, 당시에는 굉장히 큰 키였어요. 그런 큰 체격의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리사이틀이라고 이름붙이고 굉장히 화려하고 대담한 무대의상을 입고 외국 노래를 주로 하니까, 그런 착각을 했던 것 같아요."

 

패티김 : "어떤 사람들은 분장실로 찾아와서는 한국말 하세요? 라고 묻기도 했어요."

 

패티김(가수) 전남편 길옥윤과의 만남

이 시기에 패티김은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에서 가끔씩 리사이트 형식의 무대를 갖는 식의 활동을 이어갔는데요, 그러던중 작곡가 길옥윤을 만나 점점 가까워지게 됩니다. 

 

패티김 : "원래 나는 국제결혼을 꿈꿨어요. 저는 더 넓은 세상으로 가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당연히 외국남자와 결혼할 걸로 여겼어요. 또한 미국 영화에 나오는 가정 생활에 대한 환상도 있었고요."

 

패티김 : "하지만 미국에서 직접 살아보니 언어나 습관, 사고방식 차이를 실감했고, 나중에는 된장과 김치찌개를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었어요."

 

패티김 : "당시 모친이 위독해서 (미국에서) 일시 귀국했는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길옥윤씨도 (일본에서) 귀국한 거예요. 그 시절만 해도 국외에서 활동을 하는 가수나 작곡가가 무척 적어서 많이 화제가 되었죠."

 

패티김 : "당시 매스컴에서 인터뷰를 할 때면 늘 우리 둘을 같이 불렀어요. 또한 가요계에서는 우리를 질시하는 눈도 있어서, 둘이서 외톨이가 됐고, 또 공연도 같이 하니 더 끌렸던 것 같아요."

 

패티김(가수) 결혼 저남편 길옥윤 나이차 직업, 누구?

그러다가 패티김과 길옥윤은 결국 연인 관계로 발전, 1966년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패티김 : "내성적인 길 선생(음악가 길옥윤)이 새로 쓴 노래라며 전화로 들려줬어요. 그 노래가 바로 4월이 가면이었어요.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얼굴/ 잠이 들면은 꿈속의 사랑/ 날이 갈수록 깊이 정들고/ 헤어보면은 애절도 해라' 이건 100% 러브레터였어요."

 

패티김 : "이 노랫말이 청혼처럼 들려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냈어요. (길옥윤이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내가 먼저 결혼얘기를 꺼냈죠."

 

 

패티김과 길옥윤은 결혼 당시 당대 최고의 가수와 작곡가의 만남이었기에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는데요, 두 사람의 나이차는 길옥윤(1927년생)이 11살 연상이었고, 남편 길옥윤의 직업은 작곡가 겸 재즈연주자로, 당시 특히 일본에서 이름이 높았습니다. 

 

 

길옥윤은 서울대학교 치의과대학 치의학사, 경희대학교 치의과대학원 치의학 석사로 졸업했으며, 1946년 미8군 무대에서 재즈 섹소포니스트로 데뷔, 6.25 전쟁중에 육군 중위로 임관(군의관으로 참전) 1954년 육군 대위로 예편했습니다.

 

대표곡으로 서울의 찬가, 4월이 가면,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빛과 그림자, 사랑이라는 두 글자, 사랑이여 다시 한번, 당신은 모르실거야, 당신만을 사랑해, 제 3한강교, 새벽비, 별들에게 물어봐, 나성에 가면 등을 남깁니다. 길옥윤은 1995년 향년 68세의 나이고 세상을 떠납니다. 

 

패티김(가수) 전남편 길옥윤 딸

 

 

결혼 이후 패티김은 딸 최정아(1967년생)를 낳게 됩니다.

 

참고로, 딸 최정아는 나중에 유엔난민고등판무간실(UNHCR)에서 근무하며 늦은 나이에도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난민 구호활동을 벌이며 세계를 떠돌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2003년 함께 난민구호활동을 하던 영국인(크렉)과 결혼해 살고 있습니다.

 

패티김(가수) 전남편 길옥윤 이혼 사유

그런데 패티김은 전남편 길옥윤과 결혼 이후 처음에는 잘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1972년 결국 이혼하게 됩니다. 

 

 

패티김 : "내가 외국 남자와 눈이 맞아 전남편을 버렸다는 루머가 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얻측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렸다. 당시에 무대에서 두 번이나 쓰러질 정도였다."

 

패티김 : "결혼하는 순간부터 후회가 있었다. 그(길옥윤)는 결혼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패티김 길옥윤이나 혹은 패티김 남편이라는 말에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패티김 : "전남편(길옥윤)이 하루하루 즐기며 사는 사람이라면 난 1년, 10년짜리 계획을 세워서 사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1년 내내 술을 마시고 심지어 도박까지 해서 부인으로서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패티김 : "이혼 후 말년에 (길옥윤은) 일본으로 도피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병이 났다. 그분의 명예 회복을 위해 저도 많이 노력했다. 이혼한 전처로서가 아니라, 같이 음악을 했던 선배, 동지, 친구로서 말이다."

 

사실 패티김과 이혼한 뒤 길옥윤은 혜은이를 발굴해서 다시 엄청난 명성을 누리게 됩니다. 혜은이가 부른 길옥윤의 대표곡들은 당신은 모르실거야, 당신만을 사랑해, 제 3한강교, 새벽비 등 주옥같은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후 길옥윤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여러 가지 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실패하고 다시 음악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 무려 28살 연하의 여성(전연란)과 재혼해 딸을 낳아 살다가 이후 말년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 패티김과 함께 콘서트를 열기도 합니다.

 

당시 길옥윤은 암에 걸려서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였고, 결국 1995년 3월 17일 사망합니다. 참고로, 패티김이 길옥윤의 마지막 무대에 참가했을 당시 이미 재혼한 상태였습니다. 

 

패티김(가수) 재혼 남편 아바라도 게디니 나이차 국적 직업, 누구?

 

 

패티김은 길옥윤과 1972년 이혼한 후 1976년 이탈리아 계 미국인 아바라도 게디니(알만도 케디니 혹은 알마도 케디니라고 표기되기도 함)와 재혼합니다.

 

패티김 외국인 남편 아라바도 게니디 직업은 사업가이며 나이는 패티김보다 3살 연상입니다. 그런데 패티김이 재혼할 당시 그의 불륜 루머가 퍼지기도 합니다. 

 

패티김 : "내가 외국 남자와 눈이 맞아 남편을 버렸다는 루머가 퍼졌는데 사실이 아니다. 길옥윤과 1972년에 이혼하고 지금 남편과 1976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나 자신과 음악을 위해서라도 절대 부정한 짓을 한 적이 없다."

 

패티김 : "현재 남편이 청혼할 때 당신이 아이를 낳아주면 아이 몸무게 만한 보석을 선물하겠다고 했다. 나중에 딸아이(카밀라)를 낳고 7.5캐럿 사파이어를 받았다."

 

패티김 : "남편이 나와 만난 뒤 50일간 매일 100송이 장미를 보냈다. 사실 남편은 내 팬으로 만난 사람이었다. 집이 꽅으로 가득차기도 했다."

 

패티김(가수) 남편 아바라도 게디니 딸 카밀라, 이혼 루머

 

 

이후 패티김은 1978년에 둘째딸 카밀라를 낳게 됩니다. 딸 카밀라 게다니는 훗날 UCLA에서 음악을 전공하면서 아마추어 록밴드 보컬과 아카펠라 그룹 멤버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1999년 2월 엄마의 데뷔 40주년 공연무대와 이후 전국 투어를 따라다니면서 가수의 길로 들어서 활동하다가 이후 미국에서 웨딩플래너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참고로, 패티김이 외국인 남편 아라바도 게디니와 이혼했다는 루머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패티김이 남편과 떨어져 지내기 때문에 생긴 루머였습니다. 

 

 

패티김 : "요즘은 남편과 1년에 다섯 번 정도 볼까요? 각자의 생활을 하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사실 30년 동안이나 같이 살았잖아요. 이제 아이들도 다 컸고 우리 인생도 좀 즐겨야죠."

 

패티김 : "그리고 남편과 오랜 기간 떨어져 있다 만나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아요. 이 나이에 다시 연애하는 기분이죠."

 

패티김(가수) 루머

이외에도 패티김은 국내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은 가수였지만, 몇가지 안 좋은 루머에 시달립니다.

 

패티김 : "과거에 패티김은 용돈 떨어지면 한국에 들어와 공연한다는 루머가 떠돌기도 했다. 가장 치명적이고 기분 나쁘고 불쾌한 얘기였다. 나는 한 번도 미국 시민권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

 

패티김 : "한국에 정착한 지가 2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사람들은 나를 미국에서 살면서 한 번씩 들어와 노래 부르는 줄 알아요."

 

패티김 : "과거 박정희 대통령 계실 때에는 청와대에 참 자주 갔어요. 저말고도 가수들이 많이 갔어요. 그랬는데 전두환 대통령 때부터는 문화 분야로 굉장히 딱딱해졌죠. 전두환 대통령이 축구만 후원을 많이 했지 예술 쪽에는 안 했잖아요."

 

패티김 : "그래서 청와대에 몇 번은 들어 갔지만 어떤 때는 심히 불쾌할 정도로 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도 당시에는 안 가면 미운 털이 박히니까 할 수 없이 갔죠."

 

패티김 : "청와대에 가면 모자도 쓰지 말라, 반지도 끼지 말라는 등 간섭이 아주 심했어요."

 

패티김(가수) 은퇴 이후 가족 근황

 

 

패티김은 오랜 세월(54년) 가수로 활동하다가 2012년 은퇴를 하게 됩니다.

 

패티김 : "오랫동안 고민하고 갈등했지만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시작도 중요하지만 화려하고 멋진 마무리도 중요하잖아요."

 

패티김 : "절대 건강 문제로 은퇴하는 것은 아니에요. 제 신체 나이는 아직 40대예요. 매일 운동하고 있죠. 그런데 한 번 올라간 자리를 지키는 것은 그 자리에 올라가는 것보다 몇 배는 힘들어요. 그래서 작년(2011년) 9월에 은퇴를 결심했어요."

 

패티김 : "석양이 온 세상을 붉고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처럼 멋진 모습으로 여러분의 기억에 남고 싶어서..은퇴 후에는 정말 제 도움이 필요하고, 그리고 (관객을) 무료로 모실 수 있는 곳에서만 노래할 거예요."

 

그리고 패티김은 은퇴 이후 무료 무대에 몇 번 서면서 팬들의 성원에 보답한 적은 있지만 공식적인 석상에는 전혀 서지 않았습니다. 

 

그런 패티김이 지난해(2022) 11월, 12월 3부에 걸친 불후의 명곡 패티김 편을 통해 거의 만 10년 만에 방송에 출연하게 되어 큰 관심을 모은 바 있는데요, 이번에 또 불후의 명곡에 출연하게 되었네요. 

 

그리고 이번에 특히 그의 가족들이 방송을 통해 최초 공개돼 눈길을 끌기도 했는데요, 앞으로도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종종 보았으면 하네요. 이상 가수 패티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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