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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하춘화가 TV조선 화요일은 밤이 좋아에 출연합니다. 이에 하춘화 나이 과거 프로필 남편 자녀 등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가수 하춘화에 대해 알려진 정보를 모아 정리해보았습니다. 

 


하춘화(가수) 나이 키 혈액형 고향 종교 학력 

 

가수-하춘화

 

가수 하춘화의 본명은 하춘화입니다. 하춘화 나이는 1955년 6월 28일생으로 올해 66세입니다. 하춘화 키는 162cm, 혈액형은 A형이라고 하고요, 하춘화 고향은 전라남도 영암군이며, 종교는 천주교(세례명 체칠리아)라고 합니다. 

 

하춘화 학력은 서울수송초등학교, 정화여자중학교, 일신여자상업고등학교, 경남대학교 병설 산업 전문대학 가정학 전문학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가정학 학사,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공연예술학 석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예술철학 박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춘화(가수) 프로필 및 경력

하춘화는 1961년 레코드를 취입하면서 데뷔, 이후 1966년 아빠는 마도로스 히트, 그 이후에도 잘했군 잘했어, 영암 아리랑, 연인 부르스, 아리랑 목동, 날 버린 남자, 연하의 남자 등 무수히 많은 곡들을 히트시킵니다. 

 

 

하춘화(가수) 과거 데뷔 및 활동

 

가수-하춘화

 

하춘화는 7살 때인 1961년 박정희 전대통령이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해에 데뷔, 처음에는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됩니다. 

 

하춘화는 그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 하종오에 의해 서울 동아예술학원에 다니게 되었고, 거기서 8개월 동안 노래를 배우고 난 뒤 가수로 데뷔하게 된 것인데요, 이런 하춘화에 대해 당시에는 상반된 시선이 공존했습니다.

 

아직 어리고 노래를 잘 부르는 하춘화가 귀엽다는 반응과 더불어 물론 너무 어린 나이에 가요계에서 활동한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공존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하춘화는 그런대로 무난하게 활동을 이어갑니다. 

 

참고로, 하춘화는 당시 한때 최연소 가수로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얼마 안 있어서 마이클 잭슨이 5살의 나이로 데뷔함으로서 그 기록이 깨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수-하춘화

 

하춘화 : "6살 아이가 대중가요 발표한 건 최라 외신들이 취재왔다. 역도산이 한국을 방문해 만났다. 일본으로 데려사거 키우겠다고 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일본인으로 귀화하라고 해서 아버지가 반대했다. 일본인이 되는 건 싫다고 해서 무산됐다"

 

 

하춘화 : "제 첫 무대는 당시 제일 큰 극장이었다. 독집 앨범에 12곡을 담았다. 발표한 노래만 2500곡 정도 된다. 신곡 연습할 시간도 없이 다음 앨범을 제작했다. 작사 작곡이 끝나면 바로 녹음에 들어갔다. 몇 천 곡의 노래를 발표한 건 나훈아, 이미자. 하춘화 셋 뿐이다."

 

이후 하춘화는 1966년 아빠는 마도로스라는 노래를 발표 이 노래가 크게 히트하게 되었고, 1971년 고봉산과 함께 잘했군 잘했어를 듀엣으로 불러 TBC에서 4년 연속 여자가수상을 수상하면서 어린 나이에도 당시 이미자, 패티김, 김상희, 문주란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정상급 여가수로 성장을 하게 됩니다. 

 

하춘화(가수) 이주일과 인연

 

가수-하춘화

 

하춘화는 고 이주일과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하춘화 : "1977년 리사이틀 하는데 전속 사회자를 모집했다. 공고를 보고 이주일이 찾아왔다. 단장님이 너무 못생겼다고 불합격시켰는데 제가 오디션을 보자고 했다."

 

하춘화 : "탈선 춘향전 공연을 하는데 이주일이 너무 열심히 하더라. 전속 계약을 맺고 10년간 함께 공연을 돌아다녔다. 제 8500회 공연 중 7500회는 그와 함께였다"

 

훗날 이주일은 이런 하춘화를 대단히 고마워하며 "길거리에 나앉을 수 밖에 없었던 내가 하춘화 덕분에 우리집을 샀다"고 말하며 하춘화를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고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1977년 하춘화가 큰 사고를 당하면서 둘의 인연은 더욱 돈독해지게 됩니다. 

 

 

1977년 11월 11일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의 삼남극장(이리역 근처)에서 공연 도중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열차가 폭발하면서 약 59명이 사망하고 1158명이 부상을 당하는 큰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는데요, 이때 코미디언 이주일이 아수라장이 된 역사내에서 어린 하춘화를 업고 나온 것입니다. 

 

하춘화 : "이리역과 제 공연장은 500미터 거리였다. 그런데 화약을 실은 열차가 폭발했다. 위력이 엄청났다. 이리시 전체의 유리를 깨뜨렸다. 1977년 11월 11일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 싶더라. 땅속으로 떨어지는 공포가 느껴졌다. 이리시 전체가 암전됐다. 공연장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하춘화 : "나 혼자 살아 나가야 하는구나 싶었는데 이주일 목소리가 들렸다. 암흑 속에서 나는 많이 다친 것 같아요 하더라. 전쟁이 난 것 같으니 빨리 나가자고 했다. 나무 하나가 걸려 있는데 그걸 타고 올라가더라."

 

하춘화 : "담장 위로 가서 뛰어내리락 했는데 못하겠다고 했다. 결국 이주일의 머리를 딛고 내려왔다. 머리 위로 벽돌이 떨어져서 두개골 함몰 부상을 당했는데도 몰랐다. 이주일이 내 생명의 은인이다"

 

당시 하춘화는 어깨에 타박상을 입었던 반면에, 이주일은 두개골이 함몰되는 큰 부상을 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사고 이후 이주일은 대수술과 4개월간의 입원치료를 거쳐 건강을 회복합니다. 

 

이때의 일로 하춘화 역시 이주일을 평생 은인으로 여기게 됩니다. 실제로 하춘화는 2002년 이주일이 사망했을 때도 빈소를 찾았고, 장례식 때 조시를 맡을 예정이었지만 너무 가슴에 사무친다는 이유로 고사했다고 합니다. 

 

하춘화(가수) 잠정 은퇴와 복귀 이후 근황

 

가수-하춘화

 

아무튼 이때의 충격 탓인지 하춘화는 그로부터 2년 후인 1979년에 돌연 경남대학교에 입학한 뒤 학업 및 결혼준비를 이유로 은퇴를 선언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1981년 다시 가수로 복귀해 우리 사랑 가슴으로, 연인의 부르스 등의 노래를 히트시켰으며, 1983년에는 자신이 아끼는 무대의상 150벌을 후배 가수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춘화는 이후 1985년에는 남북 예술인 교환공연으로 대한민국과 북한에서 각각 최고의 가수들을 상대방에게 파견하여 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이때 하춘화가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자격으로 평양에 가서 3박 4일 동안 공연을 했습니다.

 

하춘화 : "1985년 그때만 해도 김일성이 살아있었다. 하지만 동포, 민족보다 적진에 가는 기분이었다. 벌벌 떨며 갔다. 고려호텔에 묵었다. 자유로운 개인 행동은 불가능했다."

 

하춘화 : "방 앞에 안내원이 지켰다. 방 안에서 대화도 자유롭게 못했다. 녹음기 틀어놓거나 필담했다. 3박 4일 긴장과 초조한 마음을 지냈다."

 

가수-하춘화

 

하춘화는 1989년에는 날 버린 남자 가 국민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다시 각광받기 시작, 1991년 총공연 횟수 8000회를 기록하였고 최다 개인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등록되었습니다.

 

하춘화 : "기록을 내려고 한 건 아닌데 하다 보니 최다 콘서트 보유자가 되었다. 8500회 정도 된다. 1년에 절반을 공연했다. 리사이틀 한참 할 땐 하루 공연 2-5회였다. 최대 10시간 공연이었다"

 

 

하춘화 : "한 공연에 8가지 무용, 노래 30곡을 했다. 등창난다고 땀 때문에 등이 곪았다. 사춘기도 못겪고 성장했다. 친구들과 떡볶이 먹고 짜장면집도 가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었다. 중 3 때 첫 히트곡 물새 한 마리가 나왔다. 제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후 하춘화는 2002년에 댄스 리듬의 트로트 연하의 남자를 부르면서 자신만의 춤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는데요, 이로서 하춘화는 춤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한때는 예능에서 소녀시대 춤을 추기도 했답니다.

 

또한 하춘화는 학업을 위해 잠시 은퇴하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2007년에 다시 복귀하여 나이야 가라 등 신곡을 꾸준히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학업은 계속 병행하고 있는 모양이며, 2019년 마산항엔 비가 내린다라는 노래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데요, 이번에는 화요일은 밤이 좋아에 출연하게 되었네요.

 

하춘화(가수) 학위 학력

 

가수-하춘화

 

한편, 하춘화는 공연과 학업을 병행하면서도 학업에도 열중하여 1994년에 고려대학교 자연자원대학원 최고 정책과정을 수료한 후 1998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춘화는 2000년에는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가요의 원류와 변천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공연예술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2006년 8월 25일에 성균관대학교에서 현대 대중가요 역사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예술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박사학위를 소지한 최초의 가수가 됐습니다. 

 

하춘화는 현재 학사 3개, 석사 1개, 박사 1개로 학위를 5개 보유하고 있으며, 국내 가수 중에서는 가장 갯수가 많다고 합니다. 방송통신대학교 시상식에서 시상소감으로 말했던 것은 자매가 넷인데, 다른 자매와 달리 혼자 박사학위 없이 가수로 생활하다보니 학위를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춘화(가수) 첫 번째 결혼 남편 이혼 사유

 

가수-하춘화

 

하춘화는 1981년 첫번째 결혼식을 올렸는데요, 하춘화 전남편은 정운창씨로, 직업은 사업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하춘화의 결혼 이후 가수 활동 재개로 의견이 부딪치면서 불과 1년도 되지 않아서 10개월 후 이혼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많이 개선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여자들의 바깥 활동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하춘화는 이런 상처를 안고 혼자 살다가 오랜 시간(약 10년)이 흐른 뒤에야 재혼하게 됩니다. 

 

하춘화(가수) 재혼 남편 이인순 나이(차) 직업, 누구?

1995년에 지금의 남편 이인순씨와 재혼을 하게 된 것인데요, 두 사람은 중매로 만났다고 합니다. 하춘화 남편 이인순 씨는 하춘화보다 4살 연상이라고 하구요, 하춘화 남편 직업은 당시 KBS 기획조정실 관리부차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춘화(가수) 남편 이인순 결혼스토리

 

가수-하춘화

 

그런데 하춘화와 남편 이인순 두 사람이 결혼하기까지 스토리가 재미있습니다. 

 

 

하춘화 : "중학생 때부터 알았던 국장님이 자신의 오랜 친구를 소개시켜줘 중매로 만났다. 누군지 모르고 만났다. 국장 언니가 진국이라고 해서 봤는데 와이셔츠 안에 검정 러닝셔츠를 입었더라 너무 별로였다."

 

하춘화 : "그런데 소개 이후 남편이 1년 동안 연락이 없었다. 1년 만에 크리스마스에 다시 만났다. 12월 31일 호텔에서 만나자더라."

 

하춘화 : "유명세를 타는 것이 부담됐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 남편이 1년여간을 고민 끝에 그냥 부인의 직업이 가수일 뿐이다 라고 다시 만날 결심을 하게 됐었다고 하더라."

 

당시 두 사람은 각각 38살(하춘화)과 42살(이인순)이었는데요, 결국 하춘화는 그런 남편의 신중한 마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둘은 6개월 간의 연애끝에 1995년에 결혼하게 됩니다. 

 

하춘화 : "연애결혼 같은 경우는 서로 조건을 안 따지지만 이건 경우가 달라 결혼 전 호적등본, 건강진단서를 교환했다."

 

하춘화(가수) 남편 이인순 결혼생활 자녀

 

가수-하춘화

 

두 사람은 그렇게 신중한 결정으로 결혼에 골인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재혼) 후 자녀는 없다고 합니다. 

 

사실 신혼 초에 임신을 한 적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유산을 한 뒤로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고 하네요. 하춘화는 이후 입양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하지만 결국 하지 않았습니다. 

 

 

하춘화 : "순리대로 살기를 원하는데 노력을 많이 했다. 이미 나에게 많은 걸 주셨으니 자식은 안 주시려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더 걱정하더라, 큰 불행, 결점인 것처럼 얘기하더라. 입양도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극구 만류했다. 그런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고 했다"

 

하춘화는 2020년 한 방송에서 남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하춘화 : "보통 여자들은 자신의 나이를 감춘다. 그런데 저는 나이를 밝히기에 바쁘다. 남편과 미용실을 가면 종업원들이 남편에게 물어보는 말이 있다. 종업원이 남편에게 하춘화 씨 아버님 되세요?라고 묻는다. 당시 남편은 본인이 멋을 부리지 않아 오해를 받았다는 변명을 했다."

 

그리고 하춘화는 남편 이인순 씨에게 항상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고백한 적도 있습니다.

 

워낙 인기스타이다보니 바쁜 스케줄로 인해 가정에 소홀할 수 밖에 없었음에도 항상 옆에서 묵묵히 자신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하춘화(가수) 봉사활동 근황

 

가수-하춘화

 

하춘화는 과거 방송된 SBS 희망TV에 출연해 자신의 봉사 활동에 따른 신념을 고백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하춘화는 "어린이를 돕는 것은 국경, 이념을 초월해 어른들이 해야 하는 의무다. 그들을 돕는데는 이유가 있을 수 없다"라며 소신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하춘화는 "나눔 실천은 생활 속에서 항상 함께 해야 하며, 돈이 많아서 돕는 게 아니라 평소의 소비를 조금이라도 줄여서 꾸준히 나눈ㅁ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봉사활동의 기본 정신을 고백했습니다.

 

하춘화는 하춘화는 2011년에는 56살의 나이로 데뷔 50주년을 맞아 하춘화와 함께하는 콘서트를 개최하였으며 이 콘서트에서 벌려 들인 200억 원을 불우 이웃 돕기에 기부하여 화제를 낳기도 했습니다.

 

하춘화는 지난 40년 동안 무려 300억원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이에 대해 하춘화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신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하춘화 : "부모님께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그렇게 받았다.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장 보람 있는 삶이다. 40년 전 서울 집값이 300만원이었는데 공연 수익금 1-2천만원을 기부했다."

 

하춘화 : "기부 액수를 묻길래 어림잡아 200억원 대충 얘기했는데 더 될 수도 있다. 제가 1세대인 황금심, 백설희, 현인, 김정구 선생님들과 한 무대에 섰다. 아버지가 그 자료들을 다 모으셨다."

 

하춘화 : "먼 훗날 공공기관에 기증해서 대중문화의 연구 자료로 주고 싶다 하셨다. 전남 영암군에 기증했다. 대한민국 최초로 한국 트로트 가요센터를 건립했다"

 

하춘화의 목표는 신인가수를 발굴할 트로트 아카데미 건립과 90세가 될 때까지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앞으로도 꾸준한 활약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가수 하춘화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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