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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빠이 이상용이 8월 12일 tvN스토리 회장님네 사람들에 출연합니다. 

 

과거 특히 1989년부터 1997년까지는 MBC 우정의 무대의 MC를 맡아 큰 인기를 모았던 뽀빠이 이상용입니다.

 

이에 이상용 나이 키 과거 프로필 아내 아들 근황 등 관심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뽀빠이 이상용에 대해 알려진 정보를 모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상용(뽀빠이) 프로필 나이 고향 가족 

 

 

방송인 뽀빠이 이상용의 본명은 이상용입니다. 뽀빠이라는 별명은 본인이 직접 지었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지은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상용 : "그 때는 뽀빠이 만화가 유행이었다. 올리브가 키가 큰데 우리 마누라랑 닮았다. 뽀빠이는 딱 나였다. 불의와 싸우고 알통도 나를 닮아서 내 이름 앞에 뽀빠이를 붙였다."

 

 

이상용 나이는 1944년 4월 2일생으로 올해 나이 80세입니다. 이상용 고향은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이며, 가족으로는 아내 윤혜영과 2남 1녀를 자녀로 두고 있으며 며느리와 손자 이노엘(2011년생)이 있습니다. 

 

이상용 종교는 원래 개신교였지만 이후에 가톨릭으로 개종 세례명은 헨리코라고 하며, 학력은 대전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임학과,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상용은 학군사관 5기 출신으로 대한민국 육군 중위 전역했으며, 현재 소속사는 이메이드 소속입니다. 

 

* 김용건 나이 프로필 전부인 이혼 부인(아내) 아들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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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sy0519.tistory.com

 

이상용(뽀빠이) 집안 가족사 부모 과거 

 

 

이상용은 태어날 때부터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이상용 : "내 인생을 1억짜리 인생이라고 말한다. 파란 지폐 1만장이면 1억이지 않나. 파란만장하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기구하게 태어난 사람 없다."

 

이상용 : "사변 때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 당시 아버지가 백두산에 있었다. 엄마는 부여에서 백두산까지 10개월 동안 걸어갔다. 가보니까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살더라. 울면서 내려왔다."

 

이상용 : "엄마가 열 달 동안 뭘 먹었겠냐. 돼지 밥 얻어먹으며 끼니를 때워 나도 힘이 없게 태어났다. 그런데 가족들이 회의를 열고 이놈은 살아도 평생 여동생 고생시킨다며 죽이자고 했다."

 

미숙아로 태어나 너무나 병약해서 가족들은 그가 살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인데요, 이에 그를 산채로 토끼장 밑에 묻었디만 다행히 당시 7살이던 막내 이모가 몰래 이상용을 구해내어 산으로 도망해 이 아기 안 키우면 같이 죽어버리겠다고 버텨 결국 이상용을 그냥 키우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상용 : "어머니의 젖이 말라 살길이 막연했지만 동네 아주머니 200여 분에게 젖동냥을 하며 또 겨우 살아났다. 건강한 아이는 아니었다. 3세 때 처음 문고리를 잡고, 5세 때 겨우 걸음마를 했을 정도로 약골이었다."

 

이상용 : "느리고 약해서 놀이판에는 키지 못하고, 그 대신 가방 지킴이를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친구를 만들었다." 

 

 

이후 서면국민학교 1학년 때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 대전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사실은 어머니가 대전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 떠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상용 : "대전의 아버지를 찾아 온 가족이 고향 마을을 떠났다. 어머니와 누나, 나 셋이서 논두렁 물 마시고 고구마 뽑아 먹으며 300리 길을 보름 동안 걸었다."

 

이상용 : "아버지는 신문사 대전 지국장이셨는데, 알뜰하게 집을 챙기는 분은 아니셨다. 어머니는 남편에게 싫은 소리 하나 못 하는 분이셨다. 갑작스러운 이사가 방황하는 아버지를 찾아 나선 길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이상용(뽀빠이) 건강해지게 된 계기

그런데 그때까지 이상용은 너무나 병약해서 책가방을 들 힘조차 없어 아버지가 대신 책가방을 들어줘야 하는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상용은 이후 삼촌의 도움으로 건강체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상용 : "11세 때 장손은 우리 집안의 대들보다라고 아령을 사다 줬다. 가방에 도시락은 없어도 아령은 챙겨갈 정도로 열심히 운동했다. 몇 달 하다 보니 근육이 만들어진다는 느낌이 왔다."

 

이상용 : "그때부터 지금까지 60년이 넘도록 하루 2시간 운동을 거른 적이 없다. 술, 담배, 청량음료, 커피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렇게 불굴의 노력으로 매일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이상용은 이후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쯤에는 다른 평범한 아이들 수준으로 체력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상용(뽀빠이) 학창시절과 군대

 

 

그리고 이후 고등학교 때 보디빌딩을 시작해 고3 때인 1962년 미스터 대전고를 수상했고, 동녘회라는 주먹 서클 회장을 맡아 지역 최강자 자리를 놓고 대전공고 일진과 1대 1 격투를 벌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일로 경찰서를 들락거릴 때마다 아버지가 신문사 빽으로 문제를 해결해주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고 3 때 조직원 31명을 이끌고 상경해 대한극장에서 벤허를 보고 귀가한 것으로 단체정학을 맞았을 때는 아버지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상용은 고 3 2학기가 되어 정신을 차리고, 두 달동안 피나게 공부한 끝에 고려대학교 임학과에 원서를 넣고, 압도적인 신체능력을 선보인 결과 결국 합격하게 됩니다.

 

이후 이상용은 고려대학교에 진학해서는 대학 보디빌딩 대회에서 우승해서 미스터 고대로 등극하기도 했고, 이외에도 고려대 응원단장으로 활약하기도 합니다. 

 

이상용은 ROTC(5기) 장교로 군에 복무했고 병과는 기갑으로 전차소대장을 역임했고, 1967년 3월 지금의 아내와 결혼 후 육군 소위 임관, 기갑부대 탱크 소대장이 그의 보직이었다고 합니다.

 

첫 발령지인 강원도 인제는 단신으로 부임, 1968년 1.21 사태 때 김신조를 잡으러 화진포까지 출동하기도 했고, 1969년 1월부터 1969년 1월까지 베트남 전쟁에 1년간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가평으로 임지를 옮기면서 아내와 가족들과 같이 살기 시작, 1970년 3월 전역하고 나서는 서울에 상경했지만 취직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당시 농대 졸업생은 산림공무원 말고는 취직이 어려웠다고 함) 

 

그런 상황에서 당시 중앙일보 사업부에 다니고 있던 아내가 택시에 치는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미혼으로 속이고 근무하던 아내의 정체가 드러나 퇴사까지 해 당장 생활비와 병원비가 필요했던 그는 이것저것 따지고 잴 상황이 아니었기에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이상용 : "모찌떡 하나로 하루를 버티고 노란 양은 냄비에 중국집 짜장면 받아다가 병원으로 날랐다. 청계천에서 취객들 택시 대신 잡아주기, 술집 웨이터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신문 배달하다가 남의 집 우유도 많이 훔쳐 먹었다. 배달원과 우유 주인들에게 지금도 죄송하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을 해도 사정이 나아질 기미가 없어 을지로 5가 중부시장에 나가 새벽부터 청소를 하고 상인들의 짐을 날랐다고 합니다. 부지런한 이군이란 별명이 생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상인들이 불합격품을 갖다 팔라고 내주기도 했고, 북어 대가리, 다리 뜯긴 오징어 등을 시장 입구에서 한주먹 천원에 파격 세일하고 , 나중에는 고향에서 김을 받아다 팔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이상용은 외판원이나 보험설계사 등을 하기도 했지만 사정이 나아지지 않아 방향을 바꾸라는 조언을 듣고 기회를 얻어 1971년 CBS 기독교방송의 MC로 방송을 시작합니다.

 

이상용(뽀빠이) 데뷔 활동

 

 

그러다가 이후 같은 청청남도 출신으로 평소 친분이 있던 변웅전 아나운서의 소개로 MBC 유쾌한 청백전에 보조 MC까지 맡았고, 1973년 처음으로 TV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패기있고 신선한 방송인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후 이상용은 1975년 KBS 어린이 노래 프로그램인 모이자 노래하자에서 진행보조를 하다가 MC로 승격, 뽀빠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상용은 특히 당시 아역 배우 출신 박설희와 콤비로 명성을 높였고, 이지혜, 장서희 등과 진행하기도 했고, 이후 1980년대 중반 한때 전국노래자랑 MC를 맡기도 했으며, 1989년부터 1997년까지는 MBC 우정의 무대의 MC를 맡아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이후 이상용은 2000년 MBC 아름다운 인생 이후부터는 노인의 친구라고 할만큼 노인, 실버 대상 행사, 방송에 많이 나갔는데요, 실제로 이상용은 노인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이상용은 1999년 코미디언 문영미와 함께 성인 개그음반 뽀빠이 이상용의 폭소 열차를 내기도 했고, 또한 1973년 한국 어린이 보호회(현 세이브더칠드런코리아)를 세워 심장병 어린이 등 불우아동 돕기 사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사비를 들이기도 하며 16년 동안 567명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찾아주었다고 하며, 1994년 이벤트 업체 겸 출판사 뽀빠이훼미리를 세워 가슴속의 작은 소망 등 심장병 어린이 수기를 6권이나 내기도 했습니다. 

 

이상용 : "하루는 내가 사회를 보는데 한 부모가 심장병으로 아픈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수술비가 없어서 수술을 못 하고 있다더라. 당시 MC 출연료가 1만 4000원이었는데 수술비가 1800만원 수준이었다."

 

이상용 : "그때 내가 600만원 전세 살고 있었는데 일단 (내 돈으로) 아이 수술부터 시켰다. 수술비 마련을 위해 3개월 정도 야간업소 무대에 올랐다. 이후에 소문이 났는지 내 집 앞에 심장병 가진 아이와 그 부모가 몰려왔다. 그렇게 가진 돈 하나 없이 (지원을)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이후 이상용은 1996년 이른바 횡령 의혹에 휘말리기도 했는데요, 4500만원짜리 집이 아니라 40억원 호화주택에 산다, 30년 고물차가 아니라 벤츠 승용차를 탄다, 후원금 빼돌려 파주에 땅 1만 평을 샀다는 등의 소문이 나기도 하면서 수사를 받았지만 1997년 2월 무혐의로 사건이 종결됐습니다. 

 

이로 인해 우정의 무대는 아예 폐지가 되었고, 대전역 앞에서 우리 아들은 그렇지 않다고 프린트물을 돌리던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이상용은 미국 서부로 건너가 고려대 출신이 대표로 있는 여행사에서 관광가이드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며 지내다가 이후 2000년 강원매거진으로 복귀, 이후 대전 MBC 주부 가요열창, 경인방송의 청춘 노래자랑, 전주방송의 와글와글 시장가요제, MBC 늘 푸른 인생 등을 하며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한 달에 강의를 50여 차례 다니며 왕성하게 활동하기도 했고, 이후 코로나 19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면서 간간이 아침마당, 불후의 명곡, 6시 내고향, 마이웨이 등 여러 방송에 출연해온 이상용인데요, 이번에 또 오랜만에 회장님네 사람들에 출연하게 되었네요. 

 

 

한편, 이상용은 2세대 지프 랭글러(TJ)를 자가용 승용차로 타고 다녀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차량관리를 상당히 공들여서 했으며 군용 도색까지 해서 개성을 살렸다고 합니다. 

 

<이상용 수상 경력>

-1987년 국민훈장 동백장

-1995년 대한민국 5.5문화상

-1998년 문화관광부장관 표창 선행연예인

-2007년 제 5회 대한민국 환경문화대상 MC상

-2015년 제 8회 케이블TV 방송대상 스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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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용(뽀빠이) 결혼 아내(부인) 윤혜영 나이(차), 누구?

 

 

이상용은 1967년경 지금의 아내 윤혜영 씨와 결혼식을 올렸다고 합니다. 이상용과 아내 윤혜영 씨 두 사람의 나이차는 둘다 1944년생인 78세로 동갑이라고 합니다.

 

방송에서 이상용은 아내 윤혜영 씨가 이상용보다 1살이 더 많다고 말해왔는데요, 실제로는 둘이 출생 연도는 같지만 아내 윤혜영 씨가 이상용보다 생일만 4개월이 빠르고 또 대학교 1년 선배이다 보니 그렇게 말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키도 아내가 더 크다고 합니다. 

 

이상용 : "아내가 (키가) 더 크죠. 그래서 우리는 둘이 앉아서 이야기합니다. 아내가 키도 크고 나이도 저보다 많아요. 조금 많아요. 절 선택해준 것에 늘 감사하며 사랑해요. 처음에는 누나라고 부르다 호칭도 바꿨어요."

 

이상용(뽀빠이) 아내(부인) 윤혜영 결혼스토리 

 

 

이상용은 아내 윤혜영 씨를 대학 시절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이상용 : "아내가 고려 대학교 1년 선배였다. 대학 4학년 때 아내가 졸업했을 때였다. 아는 사람 누나 집에 갔다가 거기서 같이 하숙하더라. 정말 아름다워서 첫눈에 반했다."

 

 

이상용 : "당시 애인이 있었는데 헤어지고 아내에게 정식으로 대시했었다. 물론 처음에는 말을 안 듣더라. 누나(지금의 아내)를 부르기 위해 도봉산에 집 한 칸을 하루 만에 지었다."

 

이상용 : "그게 4월 30일이었는데 청혼 예정일이었다. 물론 누나는 몰랐었다. 누나 밖에 못 나가, 여기 간첩 세 명이 산에 왔대, 나가면 죽어 라고 겁을 줬다. 못 도망가게 하려고. 저녁 9시부터 결혼하자고 빌어서 새벽 4시에 응답받았다. 그래서 바로 결혼했다."

 

아내 윤혜영 : "일단 착한 걸 봤고 행동도 씩씩하게 잘하고 다음에 나가서도 잘 적응하고 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혼 이후 도봉동 방 한 칸에서 어렵게 결혼생활을 시작해 한동안 고생도 많이 했다고 하며, 오랜 무명시간동안 아내가 생계를 책임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상용 : "고생을 말도 못한다. 그때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다. 신문사에서 일을 했는데 교통사고로 그만뒀다. 전신깁스를 했으니까. 그렇게 크게 사고가 났다."

 

이상용 : "택시가 정류장에 있는 아내를 받았다. 공중에 붕 떴다. 당시 딸이 임신 3개월이었다. 같이 날았다 떨어졌는데 죽을줄 알았는데 살았다."

 

이상용(뽀빠이) 아내(부인) 윤혜영 결혼생활

이후 이상용은 외판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방송인으로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 두 사람인데요, 사실 두 사람은 서로 맞는 것이 거의 없을 만큼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고 합니다.

 

아내 윤혜영 : "안 맞는거 많다. 거의 다 안맞다. 성격도 안맞고 음식도 안맞다. 근데 젊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한거다. 결혼도. 지금같으면 안 했을 거다. 옛날엔 다 참았다. 내가 생각해도 많이 참고 인내심 많았구나 싶다."

 

이상용 : "지금 고백하지만 그때 결혼할 때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말렸다. 나보고 결혼하지 마라. 미인박명이다. 예쁜 사람은 명이 짧다. 두번 결혼할거라고 하지 말라고 했다."

 

이상용 : "지금까지도 신경쓰인다. 혹시나 그게 맞으면 어떡하나. 일찍 죽으면 어떡하냐 그런 걱정 많이 했다. 처음 얘기하는 것이다. 서로 달라서 티격태격하고 노력하며 살았던 거다. 똑같았으면 또 달랐을 것이다."

 

이상용(뽀빠이) 아내(부인) 윤혜영 아들 딸 

 

 

이상용은 아내 윤혜영 씨와 결혼 후 슬하에 아들 2명과 딸 1명을 낳게 되는데, 그중 아들 이제륜 씨는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와 현재 대기업에 근무하는 엘리트라고 합니다.

 

큰 아들 이재륜 씨에 대해서는 과거(2010년) 결혼을 앞두고 공개하기도 했고 이후 MBC 사람이 좋다에서는 아들과 며느리와 두 명의 손자들까지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이상용 : "우리 아들은 엄친아는 아니다. 그래도 내가 원하는 만큼 출세했고 속도 안 썩였다. 얼굴을 나 안 닮고 엄마 닮아서 다행이다. 우리 아내 키가 170cm가 넘는다."

 

이상용 : "현관에서 뽀뽀해달라고 해서 뒤돌면 가슴이다. 부인이 키가 크니까 딸 키가 170cm, 아들 키가 180cm다. 우리 집에서 제일 귀여운 것이 나다."

 

이상용(뽀빠이) 근황

이상용은 지난해 한 방송에 출연해 다리 골절에 전립선 문제, 당뇨까지 건강 악화로 고생하고 있는 근황을 전하기도 했는데요, 해당 방송에서 이상용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상용 : "매일 1000원짜리 지폐를 100장씩 갖고 나온다. 리어카 끄는 사람에게 20장, 주방 일하는 사람에게 5장 등 하루에 10만원, 한 달에 300만원을 51년째 꾸준히 기부하고 있다."

 

이상용 : "아내와 리어카에 야채를 싣고 용산고 정문 앞에서 2년간 판 적이 있다. 다 팔면 2만원이다. 그때 지나가던 아저씨가 날 보고 오더니 이대로 살 놈이 아니다. 꼭 돈 번다며 3만원을 주고 가셨다."

 

이상용 : "다 팔아야 2만원인데 자본금을 주고 간 거 아니냐. 그 아저씨를 못 잊어 이걸 시작했다."

 

이번에 회장님네 사람들에 출연하게 된 이상용인데요, 앞으로도 건강한 모습으로 활약 이어가는 모습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방송인 이상용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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